콘텐츠의 이해
콘텐츠의 어원
일상에서 우리는 콘텐츠라는 단어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게임 콘텐츠, 영상 콘텐츠, 문화 콘텐츠, 의료 콘텐츠 등, 4차 산업혁명 및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 콘텐츠라는 단어를 정말 다양한 곳에서 접할 수 있게 됐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영어권에는 정말로 무수한 곳에서 이 단어를 볼 수 있다. 책의 목차에서도, 음식의 내용물을 말할 때도 ‘Content’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다.
콘텐츠는 ‘무언가를 담는다’는 의미의 영단어 ‘Contain(컨테인)’과도 많이 닮았는데, 이 둘의 어원은 함께 라는 의미의 라틴어 ‘con-’과 붙잡다 라는 뜻의 ‘tenere’의 합성어, ‘continere’이다. 본래 의미로 보면 콘텐츠는 무언가 담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는 중세, 15세기부터 대략 쓰였다고 믿어지지만, 미디어 매체 및 특정 정보를 담은 디지털 매체를 뜻하는 의미는 대략 2000년대부터 키워드로 떠올랐다고 본다.
현대의 콘텐츠
현재 많은 전문가들은 ‘문화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 때, 최근의 산업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던 ‘제4·5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으나, ‘콘텐츠’가 적용되는 산업 범위만 다를 뿐 유사한 개념이라 현재 ‘제5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점차 제4차 산업혁명 개념과 통합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콘텐츠’라는 단어의 정의를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단어의 개념이 너무 방대해 하나의 의미로 간추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국내 정부 자료 및 정부 부처에서 콘텐츠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것 보다, ‘콘텐츠기술’, ‘한국콘텐츠진흥원’처럼 영어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이다. 대중적으로 콘텐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합의가 된 상황이 아니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콘텐츠라는 단어의 의미를 ‘인터넷 등의 통신망을 통해 제공되는 각종의 디지털 정보’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통신망을 사용하지 않는 영화, 서적, 음원 등과 같은 아날로그 매체는 콘텐츠로 취급할 수 없다. 더불어 문화 콘텐츠, 교육 콘텐츠, 의료 콘텐츠 등 “디지털 정보” 단일의 형태가 아닌 그 외의 형태로도 존재하기에 현재의 콘텐츠를 단순한 ‘디지털 정보’로 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럼 콘텐츠는 과연 무엇인가, 일부는 창작물 및 저작물을 콘텐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콘텐츠를 단순히 ‘창작물’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창작물이라는 단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작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정 사상이나 이념, 정보 따위를 담은 매개”를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사설, 디자인, 영상 등의 다양한 매체로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본 내가 봐온 바로는 콘텐츠는 절대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콘텐츠를 소비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비하고 있다. 원시시대 동굴 속 벽화 그림을 넘어, 언어와 문자, 그리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저장 매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콘텐츠는 생존의 파편 또는 결과물인 것이다. 진화를 거듭해가며 그에 상응하는 결과와 부산물을 남기고, 다시금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가는 모든 행위를 하며 콘텐츠를 생산하며 소비한 것이다.
생존의 결과이자 부산물
모든 것은 생존하기 위해 존재하고 진화한다. 빅뱅으로 인해 우주가 생성되고, 지구가 탄생하며, 아메바 같은 단세포가 진화를 거듭하며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정의하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기까지 콘텐츠라는 것은 필수불가결하게 우리 주변에 생성되고 존재했다. 본인이 ‘생존한다’는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형태가 어떻든 지속적으로 진화해왔고, 그로 인해 생성된 결과와 부산물이 곧 콘텐츠인 것이다.
앞서 나는 콘텐츠를 ‘특정 사상이나 이념, 정보 따위를 담은 매개’라고 서술했다. 이를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특정한 생각이나 의식 또는 지식이나 사실이 담긴 모든 것’이라고 서술할 수 있다. 매우 뜬구름 잡는 정의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콘텐츠’라는 것은 이렇게 방대한 개념인 것이다.
모든 생물은 계속 존재하기 위해 발악을 한다. 정해진 수명을 넘어서도 생존하기 위해 번식을 하고, 자신의 분신인 자손을 남기는 행위 또한 계속 존재하기 위한 발악의 일환인 것이다.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남는 것은 본인이 생존했다는 결과라는 ‘사실’이고, 그 자체가 곧 ‘콘텐츠’인 것이다. 한국의 속담 중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것의 실체 유무는 상관없이, 정해진 수명을 넘어 본인의 존재를 남기려는 행위는 모든 유전자 속에 담긴 본능인 것이다. 현재 또는 한 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아우성, 그것이 바로 콘텐츠인 것이다.
인격체에게 콘텐츠란 무엇인가?
특정 존재가 생존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가 콘텐츠라면, 과연 스스로 ‘슬기로운 사람’ 또는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칭하는 인간과 인격체에게 콘텐츠는 무엇일까? 그리고 도대체 왜 지금 콘텐츠가 그렇게 중요할까? 이 질문 역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생각하는 동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이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고대에는 ‘생존’을, 중세에는 ‘권력’을, 근대에는 ‘계몽’을 중시했고, 현대에는 ‘이념’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인간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콘텐츠 역시 변화했다. 생존을 추구했던 고대에는 후대에게 생존하는 법을 동굴 벽화 등으로 전수했으며, 중세에는 본인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피라미드, 만리장성 같은 유적을 건설했고, 근대에는 본인들의 의지가 무엇보다 숭고했음을 예술품과 건축물 등으로 표현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본인 그 자체를 표현하고 표출하는 이념이 중요해지고, 콘텐츠 역시 이러한 이념을 다양한 형태로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수월한 형태로 변화했다.
프로파간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파간다를 단순히 ‘전쟁 선전물’로 알고 있다.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을 수호하라’는 표어와 함께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고, 애국심을 일깨우고, 징집하기 위해. 또는 전선에 나간 이들을 향한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조국의 병사들이 행한 전과와 안녕을 보고하기 위해. 상대가 얼마나 악랄한 존재인지, 왜 본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지, 전과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프로파간다가 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파간다’라는 단어가 처음 쓰이기 시작했을 땐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프로파간다의 어원은 신-라틴어로, 17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포교성성(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을 설립할 당시부터 쓰여왔다고 믿어진다. 포교성성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선교하기 위해 설립됐고,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프로파간다는 신성하고 명예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는 곧 ‘어떠한 이치를 포교하고 선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프로파간다의 어원을 생각하면, 영화·드라마, 각종 TV 프로그램, 음악 및 게임 등의 각종 미디어와 일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스피치, 토론, 토의를 넘어 일반 대회에서까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하는 행위”는 곧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대표적 사례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있다.
정보의 통제와 보급
앞서 서술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조국을 수호하라’는 표어로 국민들에게 국수주의적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프로파간다는 쓰였다. 하지만 프로파간다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손꼽자면,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치 독일’이다. 현재 프로파간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 또한 세계전쟁 당시,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됐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독일은 배상 문제와 국방력 감축 등의 문제로 경제가 파산하고, 국민들의 불만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물들었다. 이에 지지 기반을 얻어 국민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 점차 세력을 늘릴 수 있었다.
경제 파산의 원인을 유대인의 경제권 지배로 탓하고, 독일과 유럽의 진정한 지배자는 “고귀한 아리아인의 순수 혈통인 독일 게르만 족”이라며 연설과 포스터, 라디오와 영화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족주의적 사상을 계속 주입했다. 더불어 나치당의 이념과 이치에 반대되는 주장은 묵살하고, 국민들의 정보를 통제하며, 점차 해당 사상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었다. 그리고 이는 곧 나치당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냉전시대에 들어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념 싸움에도 활발히 활용되며 사회 및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상대를 향한 맹목적인 비난
앞서 현대 인간의 이치는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은 인간 또는 단체가 진리라고 믿는 믿음 또는 철학을 말한다. 중세 이후 근대로 이어지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농·어업 등과 같은 1차 산업에서 벗어나 화폐를 이용한 경제에 의존하게 되자, 인간들의 이념은 더 이상 추상적인 이상을 쫓지 않게 됐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쫓으며, 더 나은 경제 체제에 대한 탐구에 들어섰다.
중세 시대의 군주적 계급 사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자본에 의한 거래와 지배가 주축을 이뤘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시장 경제를 통한 “소유의 자유”를 쫓는 자본주의와 공동체적인 평등을 통한 “자본으로부터 자유”를 쫓는 공산주의가 대립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 진영을 향한 비판적인 프로파간다가 성행했으며, 국가를 향한 맹목적인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고, 상대를 향한 무분별한 공포와 혐오감을 자아냈다. 이런 프로파간다는 굉장히 효용성 있어, 냉전 당시 사람들은 상대 국가 사람들을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견제하거나 아예 소탕해야 하는 위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국수주의적이고 맹목적인 프로파간다는 평화주의적 이념이 떠오를 때, 국민들의 반전 사상으로 인해 점차 사그렀다.
간접적이며 교활해진 프로파간다
그럼에도 프로파간다는 현재도 꾸준히 사용된다. 비록 일 차원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나, 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미디어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파간다에 노출되는 것도 모르고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정보 통신기술의 발달로 한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의 양이 불어나, 많은 사람들이 본인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그에 따른 이치와 이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본인을 투영하고자 하는 요소가 더 다양해진 것이다.
앞서 모든 것은 생존하기 위해 발악한다고 했다. 그 생존의 증거로 자신의 이치와 이념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곳 생리적으로 존재함을 넘어, 사회적으로 자신이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다르게 현재는 단체보다는 독립체 즉, 개인이 프로파간다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타인과 다름을 인정받기 위해, 내가 특별했음을 남기기 위해, 그러면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 받기 위해서 타인의 이념을 비판하기도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간접적 프로파간다로 아날로그 매체보다는 페이스북,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와 게임 등의 온라인 매체가 활용되고 있다. 사용자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설 수 있고, 교묘하게 특정 이념을 삽입해 주장할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인 것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요소 또한 생산자의 교활한 조작이나, 생산자의 이념에 따라 무의식 중에 콘텐츠에 삽입되는 것이다.
이념의 변화
의식과 가치
“생리적으로 자신이 존재함을 넘어, 사회적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치와 이념을 주장함에 따라 펼칠 수 있는 철학적 고찰은 여기서 온다. 앞서 프로파간다는 어떠한 이치를 포교하고 선교하기 위해 즉,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치란 무엇인가, 어떠한 체계 또는 그 체계가 서는 갈피이자 근본을 의미한다. 특정 사상에 옳다 믿어지는 행위 또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앞서 서술했 듯,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생존을 위해, 권력을 위해, 계몽을 위해, 이념을 위해. 이는 곧 콘텐츠의 변화를 불렀다. 시대에 따라 이치이자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의 변화로 그걸 담는 매개 또한 변하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 문화
앞서 “중세의 군주적 계급 사회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자본에 의한 거래와 지배가 주축을 이뤄, 인간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쫓아 더 나은 경제 체제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부터 “만인은 평등하며 모두 같은 인격체로서 존중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본인과 다른 사상을 가지거나 다른 형태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 못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는 점차 분열되고, 각자의 이해 관계와 이념에 따라 “상대편”과 “우리편”을 가른다. 하지만 문명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수용함에 따라 본인을 투영하는 방법과 자신의 이치 · 이념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이는 곧 더 많은 논쟁을 낳았다. 도대체 왜 사회는 다름을 쉽게 인정치 못하고 분열하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생존하다
“사회적으로 생존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인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가치를 대대적으로 전수한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자신이 주장하고 믿는 이념이 다른 가치에 비해 옳다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생물은 더욱 강하게 생존할 수 있는 종자와 유전자를 계승하고 진화시켜왔다. 그렇기에 인간 또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계승시키려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옳다’는 가치는 상대적이다. 본인에게 당연한 이치가, 타인에게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결국 다른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해 적으로 돌리고, “소탕해야 하는 위협”이 될 뿐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가치관을 가진 독립체이다. 다른 모든 이념을 없애고 단 하나의 이념만 남기려는 행위는 곧 모두가 독립된 개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생존을 위한 발악이 필요 없어진다는 것이다.
과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인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고 “평범함”을 주된 가치로 삼았다. 따라서 진실된 본인을 숨기고, “다름”을 표현하는 행위를 지양하고, 조금이라도 다른 이를 무시하고 괄시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행위를 멀리해야 한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내가 다름을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독립체로서 사회적으로 생존할 때이다.
인디주의
혐오의 문화
현대 사회는 혐오와 차별에 익숙해졌다. 변화를 꾀하면서도 이를 타파하려는 노력은 또 다른 차별을 낳을 뿐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문화차별, 이념 차별 등 차별의 대상도 매우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만인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음에도, 사람은 모두 평등하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최근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단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차별성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로, 모두가 따라야하는 진리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비판적인 사람은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는 모두가 평등함으로 ‘모두가 똑같이’ 취급되야 한다는 신좌익주의 움직임에서 착안된 개념이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하며, 차이 없이 취급되야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인격체는 각자가 독립적이기에 생존했으며, 그것이 곧 존재 의의이기 때문이다.
근래 대중이 인디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
대중에게 주로 소비된다는 의미의 ‘메인스트림 문화’가 인디 문화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다. 최근 젊은 층에서 신문·라디오·TV 등의 주류 미디어 소비보다 모바일 SNS 및 OTT 플랫폼과 같은 뉴 미디어 소비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착안된 건지 대중은 아날로그 미디어에서도 ‘B급 감성’ 또는 ‘인디 감성’을 말하며 무언가 ‘새롭다’라고 느낄 수 있는 걸 찾고 있다. 하지만 ‘인디’라는 단어는 단순히 새롭다는 단어로 치환될 수 없다. 인디라는 단어는 독립되다는 의미를 가진 ‘Individual’에 어원을 두고 있고, 1940년대부터 독립 영화를 ‘Indie Film’이라고 부르면서 해당 단어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인디주의란?
그렇다면 ‘인디’란 과연 무엇인가? 주류 문화와 반대되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인디 영화, 인디 음악, 인디 소설 등 형태를 불문하고 대중문화와 다르게 독창적인 것을 곧 인디라고 부른다.
다양한 가치와 이념에 섞인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신념과 종교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통념을 넘어,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따르는 행위’가 점차 진리로 인정되는 추세이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젠더 관념을 개혁하고자 하고, 하나의 독립체로 정치적 활동을 꺼려하고, 추상적인 존재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앙 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새로운 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모두를 한가지의 이념으로 묶는 것보단, 각자를 독창적인 독립체로 인정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인디주의”인 것이다.
인디주의에서 프로파간다와 콘텐츠
한 사람이 살아온 삶과 그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그 사람의 사상과 이념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프로파간다와 콘텐츠는 어떻게 작동될까? 생존을 위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 자신이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모든 행위가 프로파간다이며 곧 콘텐츠인 것이다.
‘특정한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 독창적인 독립체로서 본인이 가진 사상을 전달하기에 우리가 늘 소비하고 있는 미디어 매체는 너무 손쉬운 전달체인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추구하는 사념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무의식 중에서도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콘텐츠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와 콘텐츠의 상관 관계
프로파간다와 콘텐츠의 차이
모든 프로파간다는 곧 콘텐츠이기에 콘텐츠를 빼고 프로파간다를 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모든 콘텐츠가 프로파간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앞서 서술한대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치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행위가 프로파간다이다. 그리고 콘텐츠는 생물이 생존함에 따른 결과와 부산물을 말한다. 조금 간단히 설명하자면, 프로파간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콘텐츠는 특정한 목표의 결과이자, 목표의 과정이면서도, 목표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콘텐츠라는 것은 생물이 생존함에 따른 결과와 부산물을 말한다’는 나의 생각을 표현한 이 글은 프로파간다인 것이며, 나의 이념을 전달하고자 하는 콘텐츠인 것이다. 또한, 내 존재 자체 역시 그 이념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긴 프로파간다라고 볼 수 있고, 내 자체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생존을 위해 혈액이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은 ‘생물은 생존하기 위해 혈액이 혈관을 통해 흐른다’는 사실에 입각한 콘텐츠일 뿐, 특정 의도를 전하려는 프로파간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콘텐츠 속 프로파간다
콘텐츠는 ‘존재’라는 개념이 탄생했던 시점부터 존재한 것이며, 프로파간다는 인류가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존재했다. 현재 우리는 무수한 프로파간다를 다양한 콘텐츠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유의지와 의사를 갖는 생물체라면 자신의 사상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프로파간다를 삶에서 떨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기술이 진보해 개인이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현대에서는 더욱 많은 프로파간다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OTT 플랫폼 중 하나인 ‘Disney+’에서 방영한 ‘The Falcon and the Winter Soldier’에서 팔콘인 샘과 다른 흑인들이 현재까지도 인종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과 ‘흑인 캡틴 아메리카’가 갖는 사회적 인식이 걱정된다는 주변인의 발언으로, 현재도 인종 차별이 만연한 세상임을 알리는 것과 특정인이 선한 의도를 갖더라도 책임감이 부족하면 옳지 않은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을 시청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를 담은 콘텐츠인 것이다.
콘텐츠 속에서 프로파간다가 취해야할 형태
그렇다면 콘텐츠 속에서 프로파간다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까? 앞서 프로파간다의 역사를 서술할 때, 최근에는 일 차원적이고 직접적인 오히려 대중들의 반발심만 낳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프로파간다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해야한다.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전달하려면 더 교활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The Falcon and the Winter Soldier’가 인종차별에 관한 경고와 힘을 가진 사람은 그에 맞는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사상을 담은 프로파간다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콘텐츠를 소비할 때 해당 프로파간다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콘텐츠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물론 해당 콘텐츠를 분석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특정 콘텐츠를 소비하며 무의식 중에 해당 콘텐츠가 가진 프로파간다를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창작물에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투영하기도 한다. 앞선 사례가 프로파간다를 콘텐츠에 삽입해 성공한 사례라면, 후술할 내용은 프로파간다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실패한 콘텐츠를 말하고자 한다.
2020년 11월, JTBC에서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해당 프로그램의 본래 목표는 “한 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잊힌 비운의 가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인디’의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최종 우승을 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후속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유명가수전’에서는 이들의 본래 매력인 ‘오리지날리티’를 살리지 못하고 다른 가수들의 커버곡을 부르는 형태로 소비하며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전편인 무명가수전이 평소 대중이 알지 못했던 가수들의 매력을 일깨워준다는 명확한 프로파간다를 갖고 있었다면, 후속편인 유명가수전은 해당 가수들의 높아진 인기와 가치만 생각하고 명확한 프로파간다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다.
콘텐츠에서 프로파간다의 중요성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콘텐츠에서 프로파간다는 굉장히 중요하다. 명확한 프로파간다가 콘텐츠 속에 존재해야, 대중이 해당 콘텐츠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 프로파간다가 너무 노골적이면 되려 반발심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명확한 프로파간다를 간접적이고 교활하게 콘텐츠에 삽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좋은 콘텐츠는 어떻게 만드는가?
좋은 콘텐츠의 의미
그렇다면 ‘좋은 콘텐츠’란 무엇일까? ‘좋다’라는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다. 대중에게 좋은 콘텐츠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 콘텐츠가 갖고 있는 프로파간다가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 되고 통용되는 것이므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는 무엇인지 한 번 말하고자 한다.
앞서 ‘인디주의’를 서술할 때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이념이 섞였다고 했다. 인격체 개인이 독립되고 독창적인 사상을 가지며, 각자가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사회가 돼야한다 했다. 그렇기에 개인이 가진 생각이며 사상인 프로파간다를 있는 그대로 콘텐츠에 표현하고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이념을 부정하고 멸시하기보다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파간다를 '인정' 하다
한 때, ‘사회의 일원’으로 소속되던 것이 중요한 가치로 취급되던 때가 있었다. 본인을 버리고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그 집단의 이념을 따르며 개인의 가치관을 그 이념에 맞추는 행위가 통용되던 시대. 그 시대에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를 콘텐츠에 제대로 담지 못하고, 검열되고 거부되며, 숨기기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름을 인정받는 사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이해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인정받고 싶어한다. 내가 다름을, 내가 특별함을. 그렇기에 본인의 독립적이며 독창적인 프로파간다를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프로파간다를 인정해야 한다.
독립적이며 독창적인, 인디주의적 자세
내가 타인과 다르기에 타인도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프로파간다를 인정하는 자세, 본인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의도를 명확히 표현하는 독립적인 자세. 그것이 인디주의적인 자세인 것이다.
이런 인디주의적 자세는 곧 건전하고 좋은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중은 언제나 새롭고 독창적인 것에 갈증을 느낀다. 그렇기에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자세는 곧 대중적인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때 ‘인디’였으니 말이다.
프로파간다와 인디주의 그리고 콘텐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콘텐츠이다. 특정 사상과 사념, 이념이 담긴 것은 프로파간다이다. 그리고 본인이 다르기에 타인이 다름을 인정하는 인디주의적 자세가 중요하다. 이 세가지 내용을 이해하고, 따르며 제작한 콘텐츠가 바로 ‘좋은 콘텐츠’인 것이다.
내 자신을 숨김 없이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이념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걸 명확히 파악하고 그걸 본인이 바라는 틀에 넣어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디주의와 명확한 프로파간다에 입각한 좋은 콘텐츠인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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